91주일 | 시137.1-6
은혜, 아직 남아 있습니다.
1. “우리가 울었도다.”(1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니 137편의 시인은 왜 이처럼 바벨론 강가에서 부르게 될 시온의 노래 때문에 눈물로 통곡하고 있는가?
① 시온을 잃은 슬픔 때문이다.
② 하나님의 부재를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갈망하게 되는 역설의 눈물이다.
③ 이스라엘의 범죄에 대한 각성 때문이다.
시온의 노래는 사람들이 아닌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유감스럽게도 이방의 땅 바벨론 강가였다. 죄인이라는 것을 시온이 아닌 바벨론 강가에서 깨닫는다.
2.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3절)
이처럼 하나님을 바라본 것은 이방의 땅에서, 원하지도 않는 노래를,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사로잡아 황폐케 한 자 바벨론 사람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이다.
① 하나님을 기억하게 되었다.
② 고난의 연단 가운데 시온을 향한 소망을 바라보았다.
시인은 통곡한다: “하나님이여, 이 시온의 노래를 다시금 저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나님의 죄 용서의 제사가 열납되어지는 성전에서, 하나님이 복을 주신 것을 감격하는 절기 찬양에서 울려 펴지는 그날을 주옵소서! 우리는 이 할례 없는 이방의 땅 바벨론에서 시온의 노래를 부를 수 없나이다!”
3.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4절)
비록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고 죄로 말미암아 나라를 잃고 이방의 땅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고난을 받고 있지만 ‘하나님, 더는 하나님 밖으로 걸음을 옮기지 않겠습니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습니다. 살려주십시오’라는 절규인 셈이다.
고난 속에 있는 자의 고백이다. 다 잃었다. 포로다.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 중이다. 그래서 무엇인가. 이제 아주 절망인가. 아니면 자포자기인가. 아니다. 더 물러날 곳이 없는 바닥에서 더 이상의 실패는 할 수 없다는 절규다. 비록 낯짝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지만 포로의 땅에서 하나님 밖으로 더 밀릴 수 없다는 그야말로 통렬한 자기 반성이자 회개다.
4. 우리가 아직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아버지의 따뜻한 품이다. 우리의 노래는 포로기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바벨론 강가에서, 머나먼 타국에서 쥐엄 열매를 먹어야 하는 ‘돌탕’처럼 돼지 우리에서 눈물과 통곡으로 끝낼 수 없다. 돌아가야 할 시온이 있으며, 아버지의 집이 있다. 돌아온 자식을 위해 잔치를 배설하는 아버지가 있다. 그것을 희망하는 바벨론 강가라면 우리는 얼마든지 이 고통마저도 대가를 지불할 충분한 가치가 있음을 잊지 말자.
5. 아직 불러야 할 마지막 노래는 남아 있다.
우리는 확신한다. 우리가 부를 노래는 바벨론 강가에서 가 마지막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 땅에서는 부르는 우리의 노래는 주님의 나라에서 부를 영광의 찬송을 준비하는 것에 불과하다.
① 기억하자, 이 노래는 태평성대(太平聖代), 찬란한 왕궁에서가 아니라 빈들에서, 이방의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을 받는 그곳에서 준비되고 있다는 사실을.
② 고난 가운데 있는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라! 마침내 영광의 그날이 임할 때 나도 하나님께 내어 놓을 그 노래가 있도록, 지금, 바로 내가 서 있는 그곳에서, 비록 그곳에 아무리 처참하고 실패의 고통이 있는 곳일지라도 하나님을 비웃는 노래가 아닌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 은총을 찬송하는 시온의 맑은 가락이 울려나도록, 그렇게 우리 자신을 준비하자.
③ 다시 부를 노래, 아직 남아 있다. 오늘 우리가 서 있는 곳이 바벨론일지라도 바로 거기서 다시 부를 노래있음을,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시온의 노래있음을 기억하자. 오직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은혜만이 희망이어서다.
*[예배설교] -> 주일설교나 유튜브(김충만 목사, 양무리교회 검색)로 가시면 설교를 동영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