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노트

1361주일 | T-B-J type 교회와 사람들,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행17.1-14)

1361주일 | 17.1-14

T-B-J type 교회와 사람들,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

 

    ① T-type 교회(1-9): 데살로니가(Thessalonica)

    ② B-type 교회(10-14): 베뢰아(Berea)

    ③ J-type 사람들(5-7,13): 유대인(Jew)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까지는 장장 160km나 된다. 또한 데살로니가에서 베뢰아까지도 역시 약 80km. 하지만 어김없이 만나는 게 있다. 다른 것도 아닌 사람에게, 그것도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거부당하는 고난과 핍박이다. 이렇게 길 떠나서 도착한 곳 데살로니가에서는, 그리고 또 다시 데살로니가를 떠나 다다른 곳인 뵈레아에서는 또 어떤 일들(사람들)이 바울을 기다리고 있을까. 하지만 바울은 이 땅끝에서도 어떤 모습으로 복음과 대적자들 앞에 서는가.

 

 

T-type 교회(1-9): 빌립보 데살로니가(Thessalonica)

vs

J-type 사람들(5-7): 유대인(Jew)

 

데살로니가에 회당이 있다는 것은 10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그곳에 살고 있다는 것이고, 유대인들이 있다면 구약성경을 바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1). 그래서 바울은 세 번의 안식일 동안 구약성경의 뜻을 풀어 유대인들에게 성경을 강론할 수 있었다(2). 그리고 세 번째 안식일이 가까이 올수록 강론하며 뜻을 풀어 증거한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3b) 곧 메시아라며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구원의 복음을 선포했을 것이다.

바울은 그때의 기억을 후에 데살로니가전서에서 감사로 더불어 회상하며 이렇게 간증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2.13)

이것이 4절의 분위기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여기에서도 유대인들’(5a; J-type: Jew)이 문제다. 이들의 시기심은 단순하고 명확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복음(2-3)을 거부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믿지 못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적극적으로 복음이 가는 길을 방해한다(5- ). 어떻게 방해하는가.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6b)라고 공격하지를 않나(문화 프레임), 가이사가 왕이 아니라 예수라 하는 다른 임금’(7)을 따르는 자들이라고 몰아붙이지를 않나(정치 프레임), 바울이 거처하고 있는 야손(16.21 참조)의 집에 모인 교회를 침입하지를 않나(교회가 세워지지 못하게 하려는 공포 프레임), 이것도 저것도 여의치 않자 바울을 다시는 데살로니가로 오지 못하도록 하는 조건을 제시하고 성도들을 풀어주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을 서슴없이 자행한다(권력 프레임).

그럼에도 참으로 놀라운 일은 이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지금 이방인(헬라인)들은 복음을 듣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있다. 그런데 정작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적극적으로 거부한다. 하지만 비록 세 안식일 정도의 만남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교회가 아름답게 세워진 것을 보면 하나님이 하시는 놀라운 일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게 어찌 데살로니가에서만 일어나는 일이겠는가.

 

 

B-type 교회(10-14): 데살로니가 베뢰아(Berea)

vs

J-type 사람들(13): 유대인(Jew)

 

다시 바울은 이번에도 데살로니가교회와 더 함께 할 수 없는 아픔을 간직한 채 다시 베뢰아로 향한다(10, 살전2.17). 마침 그곳에도 회당이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유대인 가운데 믿는 사람이 많고”(12a), 또한 적지 않은 이방인들(헬라의 귀부인과 남자)이 믿게 되었다. 베뢰아교회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열리고 넓게 커져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잘 받아들였다(11a).

한편 바울의 말이 사실인지를 알고자 하는 마음으로 날마다’ 히브리어로 된 구약 성경을 연구하였다(11b). 때때로 복음을 거부하는 유대인들과 같은 척박하고 강팍한 마음밭을 가진 사람들도 없지는 않지만 대부분은 베뢰아 사람들과 같은 착하고 따뜻한 심성의 성도들을 만난다. 교회는 언제나 이래야 한다. 이것이 교회다. 그래야 희망이고, 피차 복이고 은혜이고 행복이다.

뵈레아 교회는 설교자를 통해서 말씀을 받고에서부터, 스스로 성경을 상고(詳考)하고까지 계속해서이니까, 이 얼마나 아름답고 힘찬 복음을 향한 순전한 열정인가. 이처럼 말씀을 듣는 것과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는 이 둘의 균형이 참 중요하다. 혹자들은 말씀을 공적으로 듣고 받는 것은 참 잘하는데 말씀을 개인적으로 연구 묵상하는 일에는 퍽이나 게으르다. 혹은 그 반대로 말씀을 듣고 받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혼자 말씀을 연구 묵상하는 일에만 온통 시선을 집중하려는 경우가 있다. 물론 이 둘 다에 별 관심이나 우선순위를 두지 않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이지만 그러나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치는 것은 결코 건강한 신앙은 아니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80km를 달려 바울에게로 왔다. 그런데 왜 왔을까? 아니나 다를까, 이곳 베뢰아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서였다. 불행한 인생들의 헛되고 죄악된 열심이다. 어느 시대, 어디에나 이들 유대인(J-type: Jew)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바울은 이곳에서 거절하면 저곳으로 가고, 저곳에서 거부하면 또 다른 곳으로 간다. 이게 바울식 전도다. 바울만인가. 주님의 말씀도 동일하다: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 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10.10-12)

참으로 놀라운 것은 바울시대에나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에나 변함없이 이 유형의 사람들이 함께 공존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마치 주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네 종류의 밭처럼 말이다(8.4-15). 모두가 다같이 말씀을 들었다. 동일한 말씀이라는 씨앗이 떨어진다. 하나님은 헬라 이방인에게도, 유대인들에게도 말씀을 듣는 것 자체를 막으시는 것과 같은 그런 차별을 하지 않으셨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인가. 바로 마음이라고 하는 인간 심성의 이다. 따라서 지금 누구 탓할 때가 아니다. 그럼 무엇인가. 내 마음의 묵은 밭을 새롭게 고르고, 말씀이라는 씨앗이 잘 자랄 수 있도록 이를 방해하는 악의 세력들을 대항할 수 있는 영적 실력과 경쟁력을 준비하는 것이다. 이것만이 이 처절한 영적 싸움판에서 승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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