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수요 | 막9.14-32
믿음과 기도는 동색(同色)이다.
(맛있는 마가복음, pp.102-104)
해답 없는 변론만 있다.
예수님은 산 위의 하늘 영광을 뒤로하고 산 아래로 내려 오셨다. 산 위는 1차 수난예고(8.31) → 영광(1-8)인데, 같은 시간 산 아래는 여전히 고통과 다툼이다. 그것은 벙어리 귀신 들린 아이를 제자들에게 데려온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사건의 내용은 이렇다: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18b)
분명 분위기는 산 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아무리 산 위의 경험이 놀랍고 복되다 할지라도 산 아래의 문제는 그것 때문에 없어지거나 자동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산 위의 영광을 맛본 것과 산 아래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산 위는 영광이었지만, 산 아래는 삶의 숙제들이 즐비하게 기다리고 있다. 문제는 있으나 해답은 없고, 있는 것이라고는 ‘변론’ 뿐이다.
때문에 예수님은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산 아래를 해결하시려고 내려가신다. 그게 복음이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14-22)
큰 무리가 모였고, 거기에 예수님의 다른 8명의 제자들, 그리고 서기관들이 있었다. 벙어리 귀신 들린 한 아들이 있었는데 갑론을박(甲論乙駁)과 같은 변론만 난무하다. 산 아래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이란 변론뿐이다(16).
이때 주님이 문제의 곁으로 오셨다. 문제의 핵심이 드러난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19a) 문제는 믿음이 없다는 점이다. 산 아래가 산 위의 영광을 맛보지 못하는 이유는 믿음이 없어서다. 사실 제자들은 이미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6.13)던 경험이 있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아!(23-29)
믿음은 비록 내가 산 아래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게 된다. 세상이 아무리 믿음 없는 세대가 되어 변론만 하고 있을지라도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23)고 말씀하신다. 믿음은 산 아래에서도 산 위의 기적을 이루는 열쇠가 된다.
세상을 이기는 힘은 믿음이다. 믿음은 문제 많은 산 아래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다. 그리하여 산 위의 영광을 보았듯이 산 아래에서도 하늘의 기적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도록 만든다. 그래서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내가 산 아래에 있을지라도 ‘믿음’이 있으면 산 위의 기적을 보게 된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산 아래는 ‘기도’를 먹고 자란다. 산 아래에서도 믿음의 세계를 맛보고 싶기에 기도하는 일을 쉬지 않아야겠다. 비록 문제 많은 산 아래에 살아간다 할지라도 산 위의 영광을 보도록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일은 믿음과 기도를 통해 이루어진다.
산 아래의 문제가 그대로 남아있는 이유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고, 이것은 또한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믿음과 기도는 같이 간다. 건강한 믿음은 바른 기도를 기초로 세워지고, 바른 기도는 건강한 믿음에 의해 지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