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새벽 | 창30.25-43
축복의 통로, 축복의 샘
야곱은 이제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처럼 고향 가나안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된 것을 직감한다: “나로 가게 하소서!”(26) 그는 외삼촌이 사는 땅, 그 옛날 어머니 리브가가 살던 땅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땅이 아닌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땅, 지금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가 살고 있는 땅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인 것을 잊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는 12 아들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복을 이루어가고 있으나, 이 복을 뿌리내리고 흐르게 할 곳은 이곳 하란(밧단아람)이 아니라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사는 땅, 바로 자신이 태아나 자란 곳이자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땅 가나안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돌아가겠다는 마음을 라반에게 알린다.
축복의 통로(25-27)
하지만 라반은 정중하게 거절한다: “그대로 있으라!”(27b) 그는 야곱을 위해서가 아니다. 사실 라반은 이 문제에 대한 정답을 알고 있다: “여호와께서 너로 말미암아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27a) 그럼에도 여전히 야곱을 통해 얻을 복만 생각한다. 이기적이다.
생각해 보라. 야곱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예고(예약, 25.23) 받은 자 아닌가. 그렇다면 라반은 야곱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복을 받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셈이다. 야곱은 축복의 통로로 쓰이고 있으나 라반은 축복의 걸림돌이 되기를 자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라반에게로 하나님의 복이 흘러가게 하는 삶을 살아간다. 멋지다.
축복의 샘(28-43)
야곱은 라반으로부터 오는 복이 아닌 하나님이 자신을 축복하실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그 쪽으로 움직인다.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고 또 믿는 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자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렇다, 우리 또한 아무 방향과 목적 없이 휘두르다가 우연히 맞아 떨어지는 그런 유형의 복을 받는 사람이 아니다.
한편 야곱은 결코 세상의 조그만 복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러니 굽신거리거나 비겁하게 행동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교만하고, 자만하고, 거들먹거리는가. 아니다. 그럼 야곱은 어떤 복을 따라 걷는가.
먼저 아버지의 축복이다(28.3-4): 아버지의 축복이 이루어지다. 그는 12지파를 이룰 수 있는 생육하고 번성한 복을,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하신 그 땅을 얻는 복을 향해 움직인다. 이뿐 아니다. 하나님의 축복이다(28.13-15): 역시 땅과 후손의 복을 약속한다. 그리고 이 복은 ‘이 땅’ 그러니까 가나안에서 이루어질 것을 말씀한다.
이 흐름에서 야곱은 형을 피해 도망가는 길에 벧엘에서 만난 하나님께 서원하면서 “평안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28.21)기를 요청한다. 누구보다 야곱은 이 일련의 역사(흐름)을 몰랐을리 없다.
야곱은 라반에게는 축복의 통로로, 자신에게는 축복의 샘으로부터 오는 복을 받는 자로 세워진다. 비록 라반에게 속는 자로 형과 아버지를 속이던 자의 빚을 지불하는 듯하지만 그러나 그 과정에서 야곱은 바른 방향으로 건강하게 성숙해 간다.
그렇다. 그는 수태고지(25.23)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섭리와 일하심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 내는 쪽으로 조금씩 걷는다. 놀랍게도 더 이상 사기치고, 거짓말하고, 남 눈에서 피눈물 흘리게 하는 성도로 살아가지 않는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결정이 옳았음을 알게 된다. 같은 면에서 야곱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하는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세워져간다. 든든하고 감사한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신앙과 삶의 질이 좋아지고 건강해진다. 그럼 그렇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은 이처럼 실수가 없다.
지금 우리가 걸어가는 신앙행로 역시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 안에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결국 우리 역시 하나님의 영광과 선을 이루는 것으로 열매 맺게 하실 것이다. 그래, 야곱처럼 믿음으로 이 소명의 길을 걸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