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새벽ㅣ창33.1-20
•화해행전: 20년만에 화평케 하는 자로 서다.
A ❶ 그가 400 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32.6)
X1 야곱의 기도(32.9-12)
X2 얍복 나루의 씨름(32.24-32): 하나님
A’ ❷ 에서가 400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는지라(33.1)
실로 20년만의 형제 상봉이다(31.38,41). 형 에서가 4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동생 야곱을 향해 오던 출발과(32.6/❶) 마침내 동생과의 실제 만남(1-4/❷), 그 사이에 전개된 이야기(32장/X1.X2)가 어떤 작용을 한 것인가. 두 사람 사이의 충돌할 것처럼 보이던 만남이 화해와 용서로 일단락되기 때문이다.
20년만의 만남
야곱의 이야기에서는 위기의 때에 누군가가 개입한다. 먼저 아버지 이삭의 축복에서 멀어지자 형 에서의 분노는 극에 달하고, 때에 이삭과 리브가가 야곱을 보호한 일이다(27.42-45, 28.1-4). 그리고 이후 20년이 지나 귀향길에 오른 야곱을 추격해 오는 라반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라반의 언행을 바꿔 놓으신 일이다(31.24,29). 그런데 400명이나 되는 장정들을 거느리고 동생 야곱을 향해 달려오는 형 에서의 움직임을 전후해서는 특별한 분위기가 감지되지 않는다.
때문에 앞 32장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가 궁금하다. 하나님이 일단 에서에게 개입하신 흔적이 없다. 20년 전 하나님이 수태고지(25.23)를 통해 동생 야곱을 축복하신 것을 두고 이를 냉정하게 비웃었던 에서다. 동생이 축복을 가로채자 아버지와 동생의 장례식을 함께 치를 수도 있다는 식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완곡하게 거절했던 에서다(27.41). 그러니 지금 400인의 장정을 거느리고 동생 야곱을 맞는다는 것, 그렇다면 이것 또한 반역이다.
어떻든 하나님이 아브라함 → 이삭 → 야곱으로 이어지는 섭리를 진행중이시다. 이를 에서라 할지라도 모를 리 없다. 그런데 지금 그는 400인의 군사(장정)을 거느리고 야곱을 향해 진군한다. 자, 그럼 야곱이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야곱을 직접 겨냥한다. 마침내 야곱은 32장 얍복 나루터에서 하나님께 항복한다.
하룻 밤 사이, 형은 결투와 보복이 아닌 화해와 재회의 기쁨을 나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전날 밤 얍복 나루에서 야곱에게 일어난 일이다. 핵심은 이것이다. 하나님과 얍복 나루의 씨름 곧 만남이 있었고, 그러자 이제 에서도 용서와 눈물로 문제를 풀었다면 내가 에서처럼 해결하지 못할 일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내게도 에서처럼 양보하고, 내려놓고, 나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는 주님의 마음으로 품고 가지 못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더 중요한 것은 나에게 야곱과 같은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33장에 있으나 보이지 않는 핵심 중의 핵심이다. 우리에게도 하나님과의 만남이라는 은혜의 사건이 있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마침내 20년 묵은 형제 사이의 갈등과 분노와 상처가 치유된다. 야곱은 변화되었고,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선다. 이제 20년이 지난 때의 야곱은 진심으로 형을 존중하고, 용서를 구한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으나 형을 속이고 거짓말을 한 것은 옳은 행위가 아닌 것을 20년이라는 밧단아람 생활에서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오늘 나도 야곱처럼 화해하고, 용서를 구하고, 지난 상처와 매듭을 풀어야 할 자는 없는가. 때로 우리는 위를 향해서만이 아니라 아래로 어린 자녀에게도 용서를 구해야 한다. 용서는 자존심을 내려놓고, 겸손하게 무릎을 꿇는 것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하나님께 용서를 받은 자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렇듯 용서 받은 자로서 용서하는 것은 복음이 말하는 삶의 방식이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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