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주일 | 롬7.14-25
•바울고백서
[설교잇기]
*2425 vs 2627(마7.24-29)
*부자행전(창22.1-19)
*맡김과 결산(마25.14-30)
*어린 소녀의 고백(왕하5.1-14)
*형통주의보(창39.1-6,19-23)
•어찌보면 닮아갈 것 같고, 또 어찌보면 믿음의 영웅담 같은... 하지만 그럼에도 나 자신을 보면 여전히 갈등, 아픔, 상처, 침체, 두려움, 염려, 그러면서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일까... 이러고도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을까... 더 거룩하고 바르고 기뻐하고 능력있고 복되고 영향력 있게 살고 싶은데 내가 나를 보면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싶은 현재진행형의 나를 바라보며 오늘 예배 앞에 서 있다.
그래서 오늘은 바울이다. 다메섹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회심하고, 이제는 사도요,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기록하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서 있는 바울이다. 그런데 오늘 그의 고백은 우리 모두를 충격에 집어넣는다. 이럴 수 있나?
오늘은 여기서 말씀을 시작한다. 그는 먼저 원치 않은 것을 하고 있는 자신이 왜 그러는지를 알지 못한다고 괴로워한다. 그러면서 그것을 행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죄라고 고백한다. 이것이 죄 아래 있는 육신의 한계다. 그러면서 그는 깨닫는다.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자신 안에 악이 함께 있다는, 속으로는 하나님을 법을 즐거워하지만 자신 안에는 또 다른 법이 있고, 그래서 그 법과 싸우고 있다면서 마침내 실존의 탄식을 토로한다(24):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것은 절망의 선언인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바울의 최종 선포인가?
아니다. 곧바로 그는 ‘감사’의 고백을 한다. 이 부분이 오늘 설교를 하는 이유이자 목적이다. 지난 <설교잇기>에 등장하는 사람들 모두가 동일하게 건너온 인생의 흔들림이다. 그 혼돈과 아픔과 절망과, 그래서 포기하고 싶은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며 견디어 낸, 그러면서 알고 깨닫고 공감하고 경험하게 된 것은 나의 바울적인 자기고백의 순간들 안에 그분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거기에도 함께 해 주셨다는 점이다. 결국 그 일련의 과정 속에서 나는 죽고, 예수 그리스도로 살아난 것이 지금의 나라는 점 말이다.
개인적으로 7장의 모습인 나를 얼마나 많이 경험하는지 모른다. 그리고 절망한다. 어쩔 수 없는, 별 수 없는 인간으로서의 나를 안타깝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영적 모순 때문에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아파하고 괴로워했는지 모른다: “나는 이러고도 그리스도인가?”
내가 나를 믿을 수 없고, 내가 나를 구원할 수 없고, 내가 나를 거룩하게 만들어갈 수 없고, 내가 나를 완전한 인간으로 재생산할 수 없고, 내가 나를 그리스도 안으로 이끌 수 없고, 내가 나를 저 천국으로 인도할 수 없는 존재임을, 동시에 죄가 나를 그리스도 밖으로 이끌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만이 죄의 자리에서 의의 자리로 이끄는 분이심을 믿는다.
이렇듯 나는 나를 절망하게 만들지만 주님을 나를 소망하게 만드시는 분이시기에 7장의 시간표 안에서도 8장의 은혜를 본다.
내 실력이나 행위나 율법을 이루는 것으로 정죄함을 해결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와 은혜와 복음의 영광이 설 자리는 없다. 바울은 바로 그 사망의 몸 가운데서 이 모든 것을 덮으시고 해결하시며 용서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보았다. 이게 희망이다. 이게 바울고백서와 동일한 나 ○○고백서가 서는 자리다. 복음만이 희망이니까. 예수만이 소망이니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만이 죄와 사망의 법이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이니까. 이 복음이 오늘 우리에게로 왔다.
*[예배설교] -> 주일설교나 유튜브(김충만 목사, 양무리교회 검색)로 가시면 설교를 동영상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