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새벽 | 막4.35-41
광풍 앞에 믿음이 있습니까?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38)!
출발할 때는 문제가 없었다(35-36). 하지만 얼마 못 가서 큰 광풍이 일어났다(37). 주님은 주무시고 계시고, 제자들은 ‘죽게 된 것’일 수도 있는 문제를 해결할 준비가 되어있지 못하다(38).
이로 보건데 지금까지 듣고 보고 알고 믿었던 것들(1:16-4:34) 모두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있다. 이게 제자들이고, 어쩜 나의 모습이다. 평온할 때, 문제가 없을 때, 생사(生死)의 상황 앞에 서지 않을 때는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을 통해 대단하게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처럼 인생의 광풍(狂風) 앞에 노출될 때, 정작 제자들의 수준과 영적 상태가 여지없이 드러난다.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40)
문제의 해답은 주님께로부터 왔다. 제자들은 문제 앞에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 문제의 해답은 없었다. 주님은 “잠잠하라 고요하라!” 명하셨고 바다는 그 말씀에 순종하여 잔잔해 졌다. 주님은 지금 풍랑이라는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제시하신 것, 천국 복음이 전파되는 길에 만난 광풍에 대한 답으로 말씀하신 것이 다름 아닌 ‘믿음’이다. 해양경비대에 연락하는 것도, 바가지로 물을 퍼내는 것도, 구명조끼를 입는 것도, 문제 곁을 떠난 것도 아닌 어떻게 보면 풍랑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믿음을 요구하신다.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두려워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인생의 노정에서 만나는 광풍에 대한 해답은 오직 하나, 믿음이다. 광풍과 믿음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과 같아 보인다. 늘 그렇듯 광풍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평안하게 시작했다 하더라도 문제는 천국 복음이 전파되는 곁을 피해가지 않는다. 주님이 일하고 계실지라도 광풍은 있다. 예수님을 믿고 산다고 할지라도 고난과 풍파와 환난은 결코 면제되지 않는다.
문제는 내가 만난 광풍을 무엇으로, 어떻게 이겨내고 살아가는가에 있다. 한편 두려워하고 있을지라도 문제는 해결된다. 제자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계속되는 주님의 질책 앞에 서게 될 뿐이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40)
지금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1.15) 하시는 예수님의 메시야 사역이 시작된 이후, 오늘 ‘광풍’처럼 이 일을 방해하고 거역하는 역풍이 –사탄(마귀), 신성모독, 안식일, 금식, 종교 지도자들 등-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2.1-3.6).
흥미로운 것은 제자들이 광풍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광풍은 믿음으로 이겨낸다. 마가복음 1장 15절,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을 알리는 메시야 선언이 왜 믿음과 함께인가를 생각하게 되는 부분이다.
광풍이 물러간 것은 순전히 주님의 은혜였다. 내가 뭘 했기에, 그러니까 기도하고 믿고 확신하고 뭔가를 지불했기 때문에 그것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광풍이 내 삶의 언덕에 휘몰아칠 때마다 두려워하는 수준에서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가 광풍이라는 것 때문에 멈춰지지 않도록 믿음 앞에 서는 것이다. 광풍 앞에 두려워 떠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함일지라도 거기서부터 시작하여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해야 한다.
오늘도 나와 우리와 가정과 교회와 나라와 민족에 광풍은 계속 있다. 그렇다고 두려워하다가 ‘저편으로 건너가자’(35)시는 일을 멈추게 할 것인가. 무엇이 하나님의 나라를 중단 없이 계속되도록, 그리하여 100배의 결실은 물론 겨자씨처럼 큰 나무로 자라게 하는 것일까. ‘믿음’이다. 오늘도 이 믿음과 함께 주님을 따라 천국을 이루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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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0_광풍 앞에 믿음이 있습니까?(막4.35-41).m4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