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새벽 | 막9.30-50
제자도Ⅱ: ‘누가 크냐’의 제자도적 답은 섬김이다.
두 번째 수난예고(30-32)에 이어지는 제자들의 언행이다. 혹시나 했으나 퍽 실망스럽다. 자기들만의 ‘의뜸선발대회’라니? 아마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2)신 것이 모든 제자들의 경쟁심을 더욱 촉발시켰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예수님은 고난을 받고, 곧 죽을 것이라고 하시고...
으뜸이라고?(33-37): ‘섬기는 자’가 되어라.
첫 번째 수난예고(8.31)와 두 번째 수난예고(9.31) 사이에 제자들에게 나타난 문제점은 믿음과 기도의 결핍이었다(23,29). 그렇다면 자신들의 내면세계를 돌아보면서 제자로서의 새로운 결단과 같은 뭔가 변화의 소리와 같은 나눔이 이어졌어야 했다. 하지만 결과는 지극히 실망스럽기 그지 없다. 저들이 토론하고 있는 주제가 “서로 누가 크냐?”(34) 하고 쟁론(爭論)이나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수난예고와 함께 십자가 앞으로 조금씩 메시야 스탭을 내딛고 계시는 주님의 마음은 어떠셨을까? 당신은 죽으로 가는 길을 걷고 있는데 명색이 제자라는 자들은 도토리 키재기 수준에서 자기 밥그릇이나 챙기고 있으니 말이다.
주님의 기대와 나의 관심이 이처럼 상반될 수 있다. 혹 지금 이 시간에도 주님은 이것을 요구하시는데 나는 저것을 붙들고 있을 수도 있다. 주님이 원하는 것이 아닌 내가 바라고 필요로 하는 것만을 좋아하고, 선택하고, 이를 비전이라, 또한 하나님의 뜻이라 그래 가면서 욕망꾸러미를 욕망꾸러기처럼 붙들고 있지는 않은지 나를 향한 묵상과 질문을 던져본다. 그만큼 믿음과 기도로부터 아주 멀리 떠나 있는 것이(23,29) 이처럼 제자들을 세속의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어 버렸을 것이다. 이렇듯 영(靈)이 연약해지면 육(肉)의 욕망이 강해지는 법이다.
그럼에도 주님은 덤덤하게 ‘종’의 섬김을 한 어린아이를 통해 가르치신다(35-37). 세상은 최고가 되려면 결코 섬기는 종이 되어 끝자리에 서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남을 지배하고, 강력한 힘이 있어야 하고, 목적은 늘 수단을 정당화하면서, 남들에 의해 주어진 자리가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 힘으로 만들어 낸 자만이 최고의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주인공이라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주님이 사셨던 삶의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주님은 섬기는 종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지금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계시는 중이다. 으뜸은 예수님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종의 섬김과 순종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빌2.5-11).
주님은 죽음을 말하고, 제자들은 “누가 크냐?”며 도토리 키재기나 하고 있다. 완전 동상이몽(同床異夢)이다. 갈 길은 아직 먼데 제자들의 언행은 한심하기 그지없다. 예수님을 위해 사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뭔가를 얻겠다는 이 못나고 못난 죄의 근성을 제자일지라도 요원한 것이란 말인가. 벌써부터 스스로 알아서 자기 밥그릇 챙기는 논공행상(論功行賞)인가 말이다.
나 역시도 천국에서 받게 될 축복의 몫을 지금 이 땅의 가치와 성공으로 환산하여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주님께 흥정하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다. 나는 비록 부족하기는 하지만 은혜 받은 손(43)과 발(45)과 눈(47)으로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점점 지옥으로부터 멀어지는, 그것만큼 제자가 되어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종으로 살고 싶다.
연자맷돌을 목에 달고 있는, 한 손 불구자로, 절뚝발이로, 한 눈을 가지고서 주님을 만나는 일이 없어야 한다. 내가 진짜 주님의 제자라면 세상과는 좀 그래도 다르고 또 바르게 살아야 한다. 뭐가 달라도 달라야 하는 것 아닌가. 제자들만 탓하고 문제를 드러내는 것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언제쯤 나 역시 제자들이 받은 책망 앞에 서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성경을 이야기하고, 기독교적인 냄새를 조금이나마 풍겨내면 곧 믿음이 좋은 성도요 멋진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검사지가 가짜다. 그러니 이 테스트로 만들어진 것은 허상이다. 제자는 얼마나 말을 그럴 듯하게 하느냐에 의해 판정되지 않는다. 그가 말하는 것(아는 것)과 행하는 것(믿는 것)에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에 이르도록 자라고 성장하는 자가 제자다(엡4.13). 주님이 인정하시고 세우시고 쓰시는 것이 제자이지 자화자찬하거나 자칭 제자라 해서는 어림없는 얘기다. 내 말과 묵상에 내가 걸려들지 않으려면 주님이 쓰시는 그릇으로 나를 드려야 한다. 지금은 묵묵히 이처럼 살아가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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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23_제자도2: ‘누가 크냐’의 제자도적 답은 섬김이다(막9.30-50)..m4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