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노트

376새벽 | 이사야의 눈으로 유다를 본다(사1.1-9).

376새벽 | 1.1-9

이사야의 눈으로 유다를 본다.

 

예루살렘에 살던 왕족 출신의 선지자로서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이다. 그는 웃시야가 죽던(6.1) BC 739년경에 예언하기 시작하여 BC 701년경 앗수르의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진군해 올 때까지 등장한다. 유대인의 탈무드 전승에 따르면 그는 므낫세의 치세 기간에 톱으로 켜서 죽임을 당한다(11.37 참조). 아모스의 아들로서 여선지자와 결혼했으며(8.3), 두 아들이 있었다(7.3, 8.3).

한편 미가와 동시대 사람으로(1.1, 1.1), 둘 다 유다에서 일했으며, 북왕국 이스라엘 왕국에 전력을 다했던 아모스와 호세아보다는 앞선 사람이다.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는 4대 왕(웃시아,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에 걸쳐서 약 40년간을 설교한다(왕하15-21, 대하26-32장 참조). 그는 앗수르 왕국이 팽창해 가고, 그 결과 이스라엘이 멸망해 가는 과정에서, 이스라엘과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구속을 예언한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2-7).

이사야는 천지(天地, 2)를 증인 삼아 하나님의 법정에 피고(被告) 유다와 예루살렘을 고발한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친히 양육하였는데 당신을 거역하고(2) 죄로 부패했을지라도(4) 그럼에도 여전히 유다와 부자(父子) 관계를 유지하신다. 이렇듯 하나님은 변함없이 아버지시다(2,4,8). 문제는 유다다.

 

포도원의 망대같이 겨우 남았도다(8-9).

온 천지(天地, 2)에 공고된 유다의 죄상과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포도원의 망대가 눈에 들어온다. 저곳에 포도원이었다는 흔적만이 겨우 남았도다는 자막이 흐른다. 어제의 영광이 오늘의 황무함으로 순식간에 변해버린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유다의 현실이다. 그러나 완전히 진멸시키지 않으시고 겨우’(조금) 남겨 두신 것이 은혜다. 유다는 바닥을 쳤고, 하나님은 여기서부터 이들을 회복시키실 것이다. 이게 유다의 희망이다.

 

하나님이 유다를 다시 찾아오심은 희망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심판의 메시지가 아니라서 일단 안심이다. 이왕 치료(회복)를 시작하신다면 나의 정체가 적나라하게 밝혀져야 하는 것은 어쩜 당연한 수순이다. 좀 부끄럽고 수치스럽지만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처절한 외침이라면 이것쯤은 감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죄와 허물을 소돔처럼 갚지 않으시고 조금 남겨 두신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해 본다. 하나님은 유다처럼 나 또한 포기하지 않으셨다. 죄로 가득한 현재임에도 말이다(2-8). 유다를 보시며 탄식하시는 하나님이 동일하게 나를 인하여 아파하시는 것을 느낀다.

이사야의 눈으로 나를 본다. 내가 죄인이라는 깃발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음이 희미하게 보인다. 그래, 아직 살아있음이 눈물겹다. 여기서 다시 시작해 보는 거다. 하나님이 그래도 나를 이처럼 대접해 주시니 감사할 뿐이다. 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보는 이 기막힌 역설 앞에 선다. 이사야가 오고 있다. 내 마음을 열고 그의 찾아옴을 겸허하게 맞이한다. 그를 통해 나를 보고, 하나님을 볼 수 있음이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말이다. 코로나 재난의 길목에서 이사야를 만난 것이 퍽이나 다행스럽다 싶다. 참으로 적절한 때에 이사야 앞에 세워주신 하나님께 다시금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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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는 역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침'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의 언약이 이사야서를 열면서 눈시울을 적신다.
    죄로 얼룩진 내게도 '오라' 하시며 팔 벌려 맞아 주신다.
    주님의 보혈로 씻으사 흰눈보다 더 희게 하시겠다 하신다
    장마비가 장대같이 내려도,코로나19가 극성을 부려도,
    예배가 방해를 받아도 하나님 품에만 거할 수 있는 인생이라면 소망 가운데 찬양할 수 있음이 감사다.
    이사야서를 꼼꼼히 묵상함으로 하나님 아버지 마음을 내 안에 새기며 살아내기로 다짐하자.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사 도우시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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