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3새벽 | 사6.1-13
세 가지 영적인 법칙들
웃시야(아사랴, 왕하14.21)는 유다 제10대 왕으로 부친 아마샤의 뒤를 이어 16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북왕국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BC 793-53)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52년간 유다를 통치한다(BC 792-40, 대하26.1-23). 역대하 26장에 의하면 통치 초기에는 하나님을 의지하였지만(4-5) 말년에는 교만함 때문에 화를 자초했고(16),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문둥병에 걸려 죽을 때까지 별궁에 거하였다(17-23).
주 하나님을 보았다(1-4).
이때 이사야는 하늘 문이 열리는 천상의 ‘거룩하다’의 어전(御殿, 보좌)을 본다. 이사야의 소명(calling)은 여기서부터다. 하나님과의 복된 교제를 위한 영적인 제1법칙은 ‘위’를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이 이사야를 부르신 것은 당신의 거룩이 유다 안에 다시 회복되기를 원하신 것이다. 이 거룩이라는 연결 고리만이 하나님과 유다 사이를 다시 복원할 수 있다.
자신을 보았다(5-7).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면하고서 자신을 보자 이사야는 절망한다. 죄인이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복된 교제를 위한 영적인 제2법칙은 ‘안’을 보는 것이다. 이렇듯 하늘을 본 사람은 자신을 본다. 그리고 자기를 부정하며 절망한다. 욥(욥42.5-6), 베드로(눅5.8), 바울(롬7.21-25, 딤전1.15b), 다윗이 그랬다(시22.6, 51.5). 하지만 이사야의 절망(탄식)은 오래가지 않았다: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7b) 여기에 이사야의 공로가 들어갈 어떤 부분도 없다. 사죄에는 인간의 선행이나, 공로, 행위, 도덕, 윤리, 선함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사명을 보았다(8-13).
하나님과의 복된 교제를 위한 영적인 제3법칙은 ‘밖’을 보는 것으로 완성된다. 하나님은 죄인을 쓰시지 않고 그를 새롭게 고쳐서 쓰신다. 이사야는 자신을 보자, 드디어 밖이 보였다(8b: “하나님! 부족하지만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쓰시옵소서. 나를 드립니다.” 하나님은 바로 내가 서 있는 곳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곁으로 당신의 사람들을 보내셨다. 마치 죄와 심판의 대상인 유다에 이사야를 보내시는 것처럼 말이다.
위(up) → 안(in) →밖(out): 하나님과의 만남 없이는 나를 알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자신의 죄 때문에 철저하게 절망한다. 내가 누구인가를 알지 못하고서는 소명에 충실할 수 없다. 소명은 위로부터 온다. 자신 스스로가 자각하거나, 발견하거나, 세우거나,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것은 죄사함이라는 구속의 문(門)을 통과한 사람이 받아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마16:24). 여기에 생명을 거는 것이 진정한 사명자의 삶이다.
이사야는 천상의 거룩과 지상의 부패를 본 것 사이에 서서 소명을 따라 살아가게 된다. 눈과 귀와 마음이 다 병들어 있는 유다를 홀로 품고서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까지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소명이 어쩌면 피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사야에게서 목회의 그림을 본다. 어쩌면 우리시대가 이사야처럼 목회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하늘 영광 한 모금으로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목양(牧羊)하라시면 나는 그럴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사야의 소명이 왜 6장에 있는지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영광과 고난의 이중주, 이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