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노트

553새벽 |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눅11.1-13)

553새벽 | 11.1-13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끈질기게 조르기(5-8)

이 말씀은 기도의 방법론이나 기도의 기술을 가르치는 말씀이 결코 아니다. 기도의 주인이신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말씀하신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주시면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기에 우리가 끈질기게 조르기라는 간구를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그의 자녀들이 친밀한 관계일 때 일어나는 불꽃이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기도하는 네가 나를 그리 생각하고 신뢰하고 믿고 있다면 너의 기도가 이처럼 될 것이다.

 

그래서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구하고, 그분에게 전적으로 맡기는 것이다.

맞다.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위탁이자, 전적인 신뢰다. 마치 아이가 2층 침대에서 아래에서 손을 벌리고 서 있는 아빠에게 뛰어내릴 때처럼 말이다. 이것이야 말로 전적인 위탁과 무한한 신뢰에 기초한 믿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행동이다. 아들은 어떻게까지를 포함해서 모든 것을 다 부모에게 맡긴다. 의심하지 않고, 불신하지 않고, 그냥 모든 것을 다 전적으로 맡긴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바,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없애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14.36)

따라서 기도는 기도하는 사람의 영성이며, 믿음의 용량이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총량이다. 기도의 주인이시며 기도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드리는 기도를 헛되게 하지 않으신다는 하나님을 향한 전적 신뢰가 기도를 견인해 간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기도는 그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비례하며, 동시에 한 사람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그의 기도의 깊이와 넓이와 용량과 비례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은 기도의 방법론에 집착하거나 골몰하지 않는다. 이런 것에는 처음부터 관심이 없다. 오직 있다면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와 사귐 안으로 들어가는 것에 집중한다. 기도는 기술이 아니며, 기도는 방법론이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뵈옵는 것이고, 기도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고, 기도는 하나님을 누리는 은혜의 방편이다.

 

모든 종교에 기도가 있다. 응답으로 따지면 기독교에서만 기도 응답이 있는 게 아니다. 이방의 세속 종교 속에도 능력과 역사와 기적이 일어난다. 또한 절박함과 간절함이, 그래서 신을 감동시켜서 응답이라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면 기독교 밖에서 드려지는 기도 또한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고도 간절하고 놀랍기까지 하다. 지극정성이라면 꼭두 새벽에 목욕 재개하고, 정한수 떠놓고, 무릎과 손바닥 지문이 다 닳도록 기도하는 자들을 누가 무슨 재주로 당해낼 수 있겠는가.

내 기도가 내가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면 자업자득, 곧 자기공로다. 그럼 신은 필요 없고, 내 능력과 정성과 땀과 눈물이 결국 내가 원하는 결과(응답)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잘 보면, 이게 다 이방의 기도들이다. 그런데 이런 식의 기도가 우리 기독교(교회) 안에 있는가, 없는가?

우리가 하늘 아버지께 구하는 것은 맞다. 그건 틀린 게 아니다. 당연히 구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며,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날 동안에 필요한 것을 아신다. 그리고 그것을 당신에게 구하는 것을 기대하시며 이처럼 구하는 것을 통해 우리에게 그것들이 주어지는 방식으로 일하시는 것을 기뻐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는 구하는 것만으로 다 채워질 수 없다. 생각해 보라. 기도가 구하는 것만이라면 구하는 우리와 구하는 것을 주시는 하나님 사이의 관계가 주고 받는 사이 밖에 되지 않는 것 아니겠나. 그래서 기도는 구하는 것 그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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