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5새벽 | 눅17.11-19
열 모두 치유 vs 하나만이 하나님께 영광
10명 모두가 다 나병이 치유된 것과, 그 가운데 9명과 달리 예수께로 나아온 한 명이 뭔가 다르게 구분되고 있음이 심상찮다.
열 모두 치유 vs 하나만이 하나님께 영광
그 한 사람만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
문제는 15절 이후다. 한 사람 사마리아인(이방인, 16b)은 달랐다. 그는 “자신의 나은 것을 보고” 곧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가던 길을 멈추고 주님께로 돌아온다(15).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을 은혜가 해결하자 율법의 확증이 아닌 은혜를 베풀어 주신 주 앞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그리고 주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를 표한다(16a).
왜 한 사람과 아홉 사람 사이에서 머뭇거릴까?
한 사람: 하나님이 하셨다! 감사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런 마음이나 생각이나 의사가 없다는 얘기다. 결국 내가 애쓰고, 노력하고, 땀 흘린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다는 뜻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비집고 들어올 여지가 없는 것이고, 당연히 그분에게 가서 감사를 표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아홉 사람: 원하는 것만 해결되면 된다! 아홉은 예수께 나아와 간구한 이유와 목적이 단지 육체의 질병을 고치는 것이었다. 냉정하게 이야기하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신세 고치는 것 밖에는 주 앞에 온 더 깊은 이유가 없다. 예수를 믿는 목적도, 신앙생활을 하는 방향도 다 ‘나’의 필요와 목적과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에 있다. 그러니 원하는 치유(기적)를 받았으니 그것이면 다 된 것 아닌가.
신앙과 믿음, 예수님을 따르는 삶의 목표는 어디인가. 어찌 보면 우리 모두는 14절까지는 잘 간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어떻든 우리 각 사람이 원하고 바라는 것을 얻을 때까지는 열심을 품고 교회생활을 한다. 누구도 그 마음의 동기와 목적과 의도를 악한 것이라 하며 돌을 들어 칠 수는 없다. 그게 사악한 목적을 두고 하는 것인지, 우리가 오해하는 것인지는 모른다. 마치 가라지와 알곡이 같은 밭에서 공존하며 자라듯이 한 사람과 아홉 사람은 그렇게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며 함께 예수님 쪽으로 걷는다.
그런데 일단 목적이 이루어지자 그 다음이 달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14절과 15절 사이에서 머뭇거린 셈이다. 왜 그럴까. 무엇이 이렇게 만드는 것일까.
아홉에게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믿음이 없었다. 자신의 열심히라는 동전 넣어서 나병이 고쳐진 것이라는 원하는 것을 손에 쥔 것 뿐이다. 얻고 싶고, 소원하고, 바라던 것을 이루었으니 그것으로 다 된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 감사할 이유가 없다. 딱 거기까지다. 예수님과 교회와 기독교를 통해서 자신이 목적한 것 이룬 것, 거기까지다. 그리고 그 아홉의 이야기는 없다.
하지만 한 사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15,18), 감사하고(16), 주께로부터 믿음의 사람이라 인정을 받고, 그리고 육신의 질병 고치는 것만으로가 아니라 구원을 얻게 되는 한 사람은 달랐다. 그도 비록 나병이라는 육체의 질병을 고침받기 위해 예수께로 나아왔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머뭇거리다가 끝난 인생이 아니다. 그는 15절 이후를 살아간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들 가운데서 이 한 사람을 찾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