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노트

1351주일 | 창세기의 가정2(창24.1-9)

1351주일 | 24.1-9

창세기의 가정(2)

 

 

아브라함 & 사라

 

아들보다 하나님이다. 다른 그 어떤 것들보다 먼저 하나님이다. 그것도 언행일치(言行一致).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땅과 후손을 약속하실 때부터, 그러니까 75세에 창세기에 등장할 때부터다(12.1- ):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갔고”(12.4a) 그리고 50년 가까이 지난 후에, 마침내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과 믿음으로 보여주는 아버지이자 부모의 모습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 중심이다(22.1- ).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에 순종할 뿐만 아니라 아들 이삭에게도, 하나님께 대해서도, 아버지로서도, 어느 것 하나 잃어버리거나 연약함이 아닌 온전한 믿음의 모습을 유지하면서다. 정리하면, 히브리서 기자의 통찰이 눈부시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11.17-19)

 

이 일을 진행하는 창세기 241-9절에 언행하는 아버지 아브라함을 보면, 어떤 사사로움이나 사욕이나 세속적인 것들이 하나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로 볼 때 아버지(부모)의 영적 실력이 아들과 그를 통해 세워지는 가정의 모습이자 밑그림(기초)을 드러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약속을 잘 받들어 섬길 수 있는 결혼과 가정으로 세워지게 하는 것, 오직 이것이 아버지 아브라함이 바라보고 있는 아들과 아들의 가정에 대한 비전이요 기도였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삭 & 리브가

 

이렇게 해서 아버지 아브라함을 통해 여자의 후손’(3.15)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을 잇는 자가 아들 이삭이다. 아버지 아브라함과 전혀 반대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이삭이 보여준 모습은 하나님보다 아들이다. 천하의 이삭이 이래도 되는가. 하나님이 먼저가 아니고, 그것도 장자 에서라니 말이다. 아들을 사랑한 게 뭐 잘못인가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충격이자 염려가 아닐 수 없다. 이삭은 장자 에서에게 모든 소망과 축복과 언약의 성취를 이루고자 해서는 안 된다. 왜 그런가?

이미 리브가의 태중에 두 자식이 있을 때, 리브가는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 것을 알고, 리브가가 이런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리브가에게”(25.22-23a) 이어지는 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시선(작정, 섭리)이다. 하나님의 눈은 이미 어느 아들에게로 향해 있는가. 놀랍게도 이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장자 에서가 아니라 둘째 야곱이다. 이 사실을 이삭과 리브가 부모들이 그 누구보다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25.23)을 버리고, 아버지 이삭은 장자 에서를, 어머니 리브가는 차남 야곱을 사랑한다(25.28): “이삭은 에서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이미 수태고지를 통해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삭과 리브가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존하여 언행하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말씀대로 가정을, 하나님의 명령대로 자녀들을 세워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와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때 일어나는 일들이 이삭의 가정이 보여주는 모습이다. 이때 이삭과 그의 가정에 일어나는 일들을 보라. 먼저 아들 에서를 보라. 그는 장자의 명분을 야곱이 주는 떡과 팥죽과 바꿀 만큼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긴다(25.29-34). 또한 헷 족속의 딸들을 아내로 맞이하여 부모의 마음에 근심을 끼친다(26.34-35).

그러면 아들 야곱은 어떤가. 아버지 이삭이 에서를 마음껏 축복하려는 것을 알고, 이때 아버지를 속이고 이를 빼앗는다(27.4,36). 아버지 이삭도 이를 알고 통탄해 마지 않는다: “이삭이 이르되 네 아우가 와서 속여 네 복을 빼앗았도다.”(27.35) 무엇보다 이 일은 에서로 하여금 동생 야곱을 죽이겠다는 것으로 확장된다: “그의 아버지가 야곱을 축복한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27.41)

이처럼 천하의 이삭과 그의 가정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요동친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25.23b)는 하나님의 언약이 송두리째 무너질 위기가 아닌가. 왜 믿음의 가정이 이처럼 되었는가. 이삭과 리브가, 그리고 두 아들들, 이들 모두가 다 이 언약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창세기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이삭의 가정이 보여주는 불신앙과 불순종의 가정의 쌩얼(민낯)이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장면 같지 않은가. 가인과 아벨에게서? 맞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들과 우리들 자녀들의 이야기가 아닌가 말이다.

 

창세기가 바라보는 가정: ‘예수만 섬기는 우리 집!’

창세기 족장들의 가정을 방문해 보았다. 특별히 여자의 후손이라는 구속사의 족보에 오른 아브라함과 이삭까지, 이들 모두는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세워진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어느 누구도 자신이나 부모의 실력이나 노력이나 공로를 따라 세워지는 인생은 없다. 하나님 없이 이루어지는 인생이나 가정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연약하고, 부족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감히 사람들의 생각과 마음을 따라 결정하고 말하고 행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을 오래참으로 사랑하사 끝내 당신의 섭리를 이루어 가신다.

그래서 오늘을 살아가는 평범한 우리도 다시금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고 기도하게 된다. 하나님만이 나와 가정과 자녀들의 소망이어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가정과 자녀들에게 한 번만 더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그래서 우리도 다시 이처럼 기도한다: ‘하나님 아버지! 내 실력과 생각을 따라 나를 닮은 자식을 만들어내지 않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사랑으로 이루어진, 은혜로 채워지고 세워지는 가정과 자녀의 복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하셨으니 이제는 주의 뜻 이루는 한 알의 밀알되어 열매 맺게 하옵소서.’

 

아브라함의 실력대로 하셨다면 그의 가정과 이삭은 어찌되었을까.

이삭의 수준과 형편대로 하셨다면 그의 가정과 에서와 야곱은 또 어찌되었을까.

내 모습과 모양대로 하셨다면 내 가정과 자녀들은 과연 어찌 되어가고 있을까.

때문에 내 뜻이 이루어지는 가정과 자녀이기를 바라고 기대하면 안 된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긍휼과 섭리를 바라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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